블랙 팬서 (Black Panther, 2017)
방관자로 남아선 안돼
마블 코믹스에는 아직도 매력적인 히어로들이 넘쳐난다. 영화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분명히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 있을 캐릭터들을 우선적으로 골랐을 텐데, 적지 않은 수의 캐릭터들이 이미 공개되었음에도 아직도 그 모든 캐릭터들을 제치고 최애 캐릭터가 될 만한 캐릭터들이 남겨져, 아니 준비되어 있는 것만 같다. 바로 ‘블랙 팬서 (Black Panther, 2017)’를 보고 하는 말이다.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 (Captain America: Civil War, 2016)’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의 매력을 선보일지 (마블이 그런 비중을 부여할지) 예상하기 어려웠던 캐릭터였는데, 본인의 이야기로 돌아온 ‘블랙 팬서’는 확실한 아이덴티티와 메시지를 가진 매력적이고 강한 캐릭터였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는 각자 본인의 첫 영화를 갖게 되었을 때 어떤 주제 의식과 성격을 갖게 되느냐가 몹시 중요한데, ‘블랙 팬서’는 시간이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진 측면이 있기는 했지만 블랙 팬서로서 응당 책임져야 할 정서와 대변해야 할 이야기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확인해 준다는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블랙 팬서’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코믹스의 내용이나 블랙 팬서가 상징하는 바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고 할지라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블랙 팬서는 흑인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대변한다. 태생적으로 확고한 아이덴티티가 있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면을 감안한다면 영화 ‘블랙 팬서’는 그럼에도 그 부분을 더 확고하게 짚고 넘어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앤디 서키스가 연기하는 백인 악역이 등장한다고 했을 때 쉽게 그가 연기한 캐릭터가 블랙 팬서의 주적이 되겠구나 싶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아차!’ 싶었다. 그렇게 안이한 예상을 하다니. ‘블랙 팬서’는 외부의 적과 맞서기 전에 내부의 적과의 갈등 해결을 먼저 선택한다. 사실 내부의 적이라고 하기보다는 내적 갈등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텐데, 마이클 B. 조던이 연기한 킬몽거가 대변하는 메시지는 급진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현재 시점에서 고민해볼 만한 갈등 요소이기 때문이다. ‘블랙 팬서’가 오락 영화로서 에너지가 부족한 측면은 킬몽거의 비중을 주인공 티찰라 (채드윅 보스만)와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가져갔기 때문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외부의 적과 다투는 모양새가 아니라 사실상 내부의 적인 킬몽거와의 갈등이 중심이 될 경우, 영화는 자연스럽게 블랙 팬서로서의 역할보다는 와칸다 왕국의 왕 티찰라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블랙 팬서로서 더 큰 외부의 위협과 맞서는 영웅의 면모도 재미있었겠지만,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이 작품이 ‘블랙 팬서’의 타이틀을 단 첫 번째 영화라는 점에서 캐릭터가 가진 메시지와 성격을 확실히 한 점은 이런 오락적 요소의 부족함을 상쇄시킬 정도로 좋았다.
결국 영화 ‘블랙 팬서’는 킬몽거를 통해 티찰라가 각성하고 진정한 와칸다 왕좌의 주인이자 새 시대의 블랙 팬서로서 태어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급진적이긴 하지만 킬몽거가 던진 ‘방관자로 남아선 안돼’라는 메시지는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방관자가 되어선 안됀다는 메시지는 미묘하지만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이 메시지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개념보다는, 같은 흑인들 간에는 방관하지 말고 연대해야 된다는 메시지가 훨씬 더 강하다는 점이다. 흑인 연출자나 작가가 흑인 인권을 다룬 작품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연대라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문제제기와 분노 등 다양한 측면들을 등장시키면서도 결코 빠지지 않는 건 흑인 사회의 연대다. 이걸 반대로 말하면 그들은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도 여전히 약자의 위치에 있고, 누구도 자신들 외에는 진정한 이해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흑인 사회의 연대 만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킬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메시지가 짙게 깔려 있다.
아이언 맨처럼 대중들이 바라는 영웅적 면모가 강한 캐릭터로서 활약하기 이전에, 자신이 대변해야 할 메시지들을 외면하지 않고 방관하지 않는 것을 택한 ‘블랙 팬서’는 그래서 매력적이고 오히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영화다.
1. 쿠키는 총 2개가 나오는데 크래딧이 끝나고 나오는 장면에서는 그 분(?)이 마치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심.
2. 이 영화를 통해 드디어 ‘갓 오브 이집트’의 채드윅을 잊을 수 있었….
3. 지난 번 ‘블랙 미러’에 나온 레티샤 라이트를 보고는 앞으로가 기대된다고 했었는데, 역시나 ‘블랙 팬서’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배우 중 하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