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Soul, 2020)
보통날이 간절한 지금 딱 맞춰 찾아온 위로
삶에 관한 지혜를 전하려는 창작 작품들이 종종 선택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른바 ‘죽었다 살아나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저런 연유로 죽음의 목전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 더 나아가 직접적인 죽음을 맞았으나 역시 우리가 아직은 모르는 세계의 힘으로 인해 다시 삶을 얻게 되는 이야기들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삶은 어떤 이유로든 의미 있고 아름답다는 것’.
특별한 인생만이 의미 있고 중요한 삶이 아닐뿐더러, 목표를 이루거나 이루지 못하거나에 상관없이 삶은 그 자체로 모두에게 소중하고 의미 있다는 것이 이런 작품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다. 그런데 이 메시지는 너무 단순하고 너무 당연하다고까지 여겨지는 탓에 평범한 전달 방식으로는 쉽게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 메시지는 너무 진부해서 전달하는 데에 커다란 공을 들이지 않으면 듣는 이에게 ‘그걸 누가 몰라?’라는 대답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그래서 보통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많은 창작자들은 죽음이라는(정확히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판타지 성격의) 충격 요법을 동원하곤 한다. ‘업 (Up, 2009)’과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 2015)’을 연출했던 피트 닥터가 만든 픽사의 신작 ‘소울 (Soul, 2020)’ 역시 그런 범주에 있는 작품이다.
전작 ‘인사이드 아웃’처럼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어낸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메커니즘)는 이번에도 흥미롭다. 태어나기 전 영혼들에게 기본적인 성격이 부여되는 세상의 모습은 ‘인사이드 아웃’에를 나를 구성하는 뇌의 메커니즘을 구현했던 것과 비교하자면 세계관 이상으로 더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소울’은 태어나기 전 세상에 존재하던 ’22’와 우연히 이 곳에 오게 된 뮤지션 조 가드너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둘은 가장 먼 지점에서 여정을 시작하지만 결국 같은 목적을 가진 여정이었다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22와 조 가드너의 이야기가 완전히 동등한 형태로 양립한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조 가드너의 입장에서 더 자연스럽고 의미 있는 이야기로 성립되지만 22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조금 내러티브가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울’은 결국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단순하지만 가장 완벽한 삶의 지혜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에 이번에도 성공한다 (이 영화를 제대로 봤다면 성공이라는 단어는 지양해야 옳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도 누군가는 ‘그걸 누가 몰라?’라고 되물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그래도 이 영화를 통해 한 번 더 그 단순한 삶의 의미에 대해 잠시라도 돌아보게 되고, 매일 지나쳤던 일상을 아주 잠깐이라도 한 장면 한 장면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소울’은 픽사의 전작들을 통틀어 가장 어른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삶은 지치고, 일상은 반복되고, 꿈은 어느새 포기해야만 하고, 하루하루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 자책하고 실망하는 것이 잦아질 때 이 영화를 만나게 된다면, 반복되고 뻔한 삶은 의미 없어, 성공하지 못하는 삶도 괜찮아 같이 급격하게 모든 것이 단번에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달라질 게 없이 반복되는 삶 일지라도 그 속에서 아주 작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영화 속에서 평범한 일상을 다르게 마주하게 되는 모습은 지금 코로나 19로 평범했던 일상을 잃어버린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로 전달될 수 밖에는 없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지금의 코로나 시대는 굳이 죽었다 살아나는 판타지적 충격요법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평범한 일상을 잃어버렸고 또 모두가 그 평범함을 간절하게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코로나 19라는 질병은 우리에게 아주 커다란 ‘소울’ 같은 충격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많은 이들이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과 삶의 의미를 간절히 되돌아보게 되는 요즘, ‘소울’은 부담스럽지 않게 내 삶을 위로하는 다정하고 생동감 넘치는 연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