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Dark, Netflix 2017~2020)
어쩌면 올타임 최고의 시간여행 드라마
영화나 드라마를 직접 선택해서 보는 것이, 아니 직접 선택해야만 볼 수 있게 된 때부터 무언가를 보는 것만큼이나 어떤 작품을 선택할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시간은 정해져 있고 주어진 정보는 많지 않고, 특히 2시간 남짓의 영화가 아닌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시즌제의 드라마인 경우 어떤 작품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드라마를 본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다른 여러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사실상 포기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택이 중요해진 시대에 선뜻 손이 가지 않던 작품이 있었다. 제목과 예고편, 이미지 모두 끌리는 드라마였는데 독일 드라마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하나의 드라마를 끝낸 뒤 공백이 올 때마다 몇 차례나 볼 기회가 있었는데 매번 선택받지 못했던 드라마였다. (아주 상투적인 표현으로) 만약 내가 ‘다크’를 끝내 보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뒤늦게 보고 후회했을까, 아니 이 드라마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미래에 ‘다크’를 보게 된 내가 동시대에 ‘다크’를 보지 않은 과거의 나를 찾아와 어떻게든 보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만큼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다크’는 몰입감, 완성도, 감동 모두 만족스러운 압도적 작품이었다.
앞서 독일 드라마라는 이유 때문에 선뜻 선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했었는데, 실제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드라마가 아닌 유럽 혹은 남미 등에서 제작한 드라마를 보면 아주 재미있게 본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에서 조차 중간중간 움찔하게 될 정도로 전혀 다른 바이브의 편집이나 대화가 등장할 때가 있다. 심한 경우는 이런 점들 때문에 결국 끝까지 감상하기 어려운 영화나 드라마들이 많은데, 그런 과거의 경험들로 인해 아주 매력적일 것만 같은 겉모습에도 쉽게 시작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다크’는 어느 순간부터 전혀 독일어가 독일어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즉 한국어, 영어 외 다른 언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몰입시키는 동시에, 앞서 말한 움찔하게 만드는 순간들도 전혀 없다 (거의가 아니라 전혀 없다).
시간여행을 다룬 이야기는 아마 로버트 저메키스의 ‘백 투 더 퓨처’와 그 이후의 작품들로 나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만큼 ‘백 투 더 퓨처’가 시간여행을 다루는 스토리텔링 방식은 시간여행 본연이 갖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패러독스)을 완벽히 이야기에 녹여내 극적 재미와 감동의 여운을 모두 이끌어 냈다. ‘백 투 더 퓨처’ 이후에도 수많은 시간여행 영화와 드라마들이 나왔는데, 제법 괜찮은 작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구조의 복잡함에 집중한 나머지 이야기로서 몰입되는 것에 실패하거나, 시간여행을 아주 가벼운 소재로 활용한 다른 장르 영화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다음 세기가 되어서야 만난 시간여행 드라마 ‘다크’는 단언컨대 최고의 시간여행 이야기 중 하나이자, 어쩌면 ‘백 투 더 퓨처’의 단점들까지 보완하는 섬세하고 준비된 작품이었다.
(이후에는 드라마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크’는 독일의 빈덴이라는 핵발전소가 위치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마을의 외곽에 위치한 동굴을 통해 우연히 미켈이 과거로 여행하게 되면서 이 이야기는 시간여행이라는 주제로 빠르게 몰입한다.
‘다크’가 다른 모든 장르를 통틀어서 다른 여타의 드라마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중요 인물의 수가 보통의 3~4배는 된다는 점이다. 보통 1~2명의 주인공이 있고 5~6명의 조연들이 이야기를 끌어가기 마련인데, ‘다크’는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자신 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작품을 보지 않은 이들은 각 인물이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의 비중을 부여받아 각자의 스토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보통의 드라마들의 에피소드 활용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만약 단순히 에피소드 방식으로 이야기를 부여받은 것이라면 딱 그 정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또 종결될 텐데, ‘다크’의 인물들은 주인공과 동일한 비중으로 모두 각자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각자의 이야기가 에피소드 단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두 전체 이야기에 꼭 필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인물들이 많다는 것, 특히 이렇게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 파편들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점점 하나로 엮여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 ‘다크’의 이야기는 더 단단해지고 더 절실해진다. 그래서 사실 요나스 한 명을 주인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말이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는 걸 작품을 본 이들이라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백 투 더 퓨처’가 그랬던 것처럼 ‘다크’ 역시 시간여행에서만 가능한 순간들을 정확히 포착해 낸다. 과거로 돌아가 나 보다 어린 나이의 부모를 만나는 순간, 지금 보다 훨씬 나이 든 내 아이와 마주하는 순간, 그리고 다른 시간대의 나와 만나는 순간까지. 이 순간들은 시간여행 이야기에 반드시 등장하는 순간들이지만 매번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감정적인 순간들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순간들은 현실에선 전혀 경험할 수 없음에도 극 중에서 이런 순간이 등장할 땐 가장 그 순간을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도 하다. 전혀 경험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완전히 느껴지는 감정이랄까. 어른이 되어 버린 내 아이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이나 나보다도 어린 부모와 마주하는 순간,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가까운 존재와 만남의 순간은 ‘다크’에서도 역시 가장 동요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다른 시간대의 나와 가족을 만나는 순간만큼이나 감정적으로 힘겨웠던 순간은 아마 시간여행을 통해 돌이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일들이 결국 일어날 수 밖에는 없었던 일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들이다. 여기서 시간여행 이야기 만의 흥미로운 지점이 발생하는데, 누군가의 죽음은 원래 발생할 예정이었는지 아니면 그걸 막기 위해 돌아간 나로 인해서 발생하게 되는 일이었는가에 관한 점이다. 내가 몰랐다면 발생하지 않을 죽음이었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나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죽음이었는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시간여행의 굴레 속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일방적인 비극인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인물에게 결국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을 안겨주는 순간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장 마음이 무겁고 몹시 슬픈 장면들이었다. ‘다크’를 통틀어 가장 슬픈 순간들이 그랬다. 아버지의 죽음 시점과 장소를 미리 알고 어떻게든 그곳을 떠나게 만들려던 클라우디아가 결국 자기 손으로 그 날, 그 장소에서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순간, 그리고 카타리나와 그녀의 어머니와의 사건은 이 드라마를 더 감정적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쓰라린 순간들이었다 (특히 카타리나에게까지 이런 이야기가 부여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격과 슬픔이 컸다).
나는 가끔 내가 어떤 상처와 상실에 대해 이야기를 쓴다면 이런 방식으로 쓰고 싶다 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방식이 있는데, ‘다크’가 그런 생각으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물은 내 희망사항과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다크’는 시간의 인과관계로 보자면 사고로 아들 부부와 손녀를 잃은 과학자가 이들을 살려내기 위해 타임머신을 만들고자 했지만 그 과정 중에 타임머신이 아니라 다른 두 차원의 세계(평행우주)가 생겨나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그렇게 생겨난 두 개의 세계에서 문제점을 발견한 이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패를 거듭하던 중 결국 그 틈을 발견해 낸 클라우디아로 인해 두 개의 세계가 하나의 세계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시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본래의 세계로 개입해 원인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게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세 번의 시즌 가운데 본래의 세계로 개입해 원인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시점은 거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도달해서의 일이다. 두 시즌이 끝날 때까지는 두 개의 평행세계가 존재하는 지도 알려지지 않는다. 역으로 보자면 전혀 다른 (사실은 잘못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평생을, 아니 어쩌면 여러 생에 걸쳐 노력하는 한 세계 혹은 두 개의 평행세계 속 인물들의 노력과 그들의 반복되는 슬픈 역사는, 드라마의 구성상 많은 시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기 때문에 결말에 이르렀을 때 더 큰 허무함과 쓸쓸함을 안긴다.
다시 평소 쓰고 싶었던 상실에 관한 이야기 방식으로 돌아가 보자면, ‘다크’는 결국 다투고 집을 나간 그 길로 교통사고가 나서 아들 부부와 손녀를 잃게 된 과학자가 남은 평생을 이 사건을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타임머신을 만드는 것으로 벌어진 이야기다. 그렇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담긴 행동의 결과물 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우연히 그로 인해 탄생한 평행 세계 속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 속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게 되고 그들은 모두 가족과 연관이 있다. 사라진 아들을 찾기 위해,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되돌리기 위해 ‘다크’의 인물들은 시간이라는 물리적인 지배자와 싸운다. 만약 이 과학자의 이야기를 일반적인 인과관계로 전개했다면 아마 그 간절함이 덜했을 것이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그로 인해 발생한 우연의 산물들이 벌이는 수많은 간절한 이야기들을 앞서 배치함으로써, 이 과학자의 간절함은 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간절해졌다.
그래서 ‘다크’의 마지막은 특히 더 인상적이었다. 어떤 문제 혹은 상실이 일어나기 전으로 간절히 돌이키고자 했던 것은 모두 그 이전의 모습으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이었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을 문제 이전으로 되돌리게 되면 스스로의 존재가 산화되어 버리는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요나스와 마르타의 선택은 먹먹한 여운이 오래 남는다.
나는 가끔 평행우주에 존재할 또 다른 나를 떠올린다. 과학적으로 존재 가능한가 아닌가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또 다른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위로와 의지가 된다. 지금 내게 없는 것, 혹은 지금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온전히 갖고 있는 내가 다른 평행우주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습지만 혹시 지금 내게도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대책 없는 기대와 희망을 품게 한다. 그리고 그건 현실의 상실을 위로하고 삶을 나아가게 하는 나만의 비밀 같은 힘이 된다. ‘다크’를 보고 또 한 번 평행우주 속 나를 떠올려 보게 됐다. ‘다크’를 보면 결국 평행우주라 해도 시기와 방식이 다를 뿐 일어날 일은 비슷하게 일어나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존재.
아, 존재하는지도 모르지만 힘이 되는 존재 말이다.
* 어쩌다보니 시즌 1~2를 두 번 두 번씩 감상하게 되었는데 단순히 복잡한 구조가 좀 더 분명해 진다는 이유 외에도 반복 감상의 장점이 많은 드라마였다. 왜냐하면 시간여행 이야기의 특성상 시청자와 주인공은 전후사정을 모르는 시점에도 어떤 인물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시점일 때가 많기 때문에, 다시 보게 되면 처음 볼 때는 몰랐던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그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더 가슴 아픈 장면들도 많았고.
* 너무 아쉽지만 시즌 3로 끝을 내는 것이 맞고, 더 오래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