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感想)

조커 _ 동의할 수 없는 위험한 영화

조커 (Joker, 2019)
동의할 수 없는 위험한 영화

토드 필립스의 영화 ‘조커’에 조커 역할로 와킨 피닉스가 캐스팅되었다고 했을 때 아마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라고. 히스 레저가 조커를 연기한 이후로 (물론 몇 명 되지는 않지만) 조커라는 캐릭터는 남자 배우들에게 가장 도전해 보고 싶은 캐릭터이자, 영화 팬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는 캐릭터였다는 점에서 와킨 피닉스의 캐스팅 만으로도 예상되는 그림, 기대되는 그림이 있는 적절한 캐스팅이었다. 

조커라는 캐릭터가 더 많은 대중들에게 관심을 받게 된 것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다크 나이트’를 통해 놀란이 보여준 조커라는 캐릭터는 철저하게 배트맨의 천적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약점인 캐릭터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기존의 실사화 코믹스 영화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진지한 담론의 이야기가 가능했다. 다시 말하자면 배트맨은 배트맨 혼자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한 캐릭터지만, 조커는 배트맨이 있을 때 훨씬 더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얘기다.

조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나온 다고 했을 때 쉽게 예상되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서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조커라는 악당으로 변하게 되는지, 그 탄생에 관한 서사였다. 토드 필립스의 영화 ‘조커’도 실제로 이런 서사를 담고 있는데, 한 가지 다른 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 영화의 가장 큰 위험한 지점이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조커가 주인공인 독립된 이야기를 할 때 가능한 (공감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서사는 아서가 어떻게, 아니 왜 조커가 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조커’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광대로 일하며 코미디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는 아서는 그가 가진 선천적 질병 (갑자기 웃음이 나서 멈추지 않는 현상)과 우스워 보이는 광대라는 이유로 인해 고담시의 무례한 이들로부터 이유 없이 폭력을 당하거나 조롱을 당하기 일쑤다. 그러던 중 또 한 번 그런 이유로 인해 무차별 폭력을 당하던 중 우발적으로 얼마 전 동료가 건넨 권총을 꺼내 결국 가해자들을 쏴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만약 보통의 서사였다면 사회와 주변이 가하는 무차별 폭력을 당하기만 하던 인물이 실수 혹은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는 순간이 클라이맥스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가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때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는 아서의 모습이 등장했을 것이다 (평소 사회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행복한 적 없던 삶이라 할지라도 아서가 살인자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영화 ‘조커’ 속 아서는 이미 세 명을 권총으로 죽이기 이전부터 조커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발적으로 권총을 발사했을지언정 바로 그 직후 의도를 가지고 살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 번째 인물을 끝까지 쫓아가서 쏴 죽이는 장면 가운데 아서에게 갈등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시점은 영화 상으로 비교적 이른 시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부터 관객은 사실상 아서에게 공감하기 어려워진다. 그 이후의 행동들은 그간 아서가 당해왔던 사회의 폭력을 이미 넘어서는, 그래서 더 이상 아서를 동정하거나 그에게 폭력을 가했던 사회에게 일방적인 잘못을 돌리기 힘든 수준으로 점점 더 강하게 치닫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후부터 영화는 아서/조커에게 관객이 공감하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사회가 아서에게 더 배려를 했었다면 벌어졌을 긍정적인 상황들을 아서의 망상이라는 형태로 묘사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지속적으로 되묻도록 만들고,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아예 조커를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에 대항하는 대변자로, 영웅으로 치켜세우기까지 한다. 물론 아서/조커는 스스로 이들을 이용하려하거나 이들의 영웅이 되려는 생각은 애초에 없다. 하지만 영화가 조커를 묘사하는 방식은 결코 그렇지 않다. 라이브 티브이쇼에 나와서 조커가 내뱉는 말들은 근본적으로 아서의 응어리에서 터져 나오는 것인데, 이미 조커가 된 그에게 영화는 한 번 더 정서적 공감대를 일으킬 만한 결정적 무대를 제공한다. 그 후 거리에 성난 시위대가 그를 영웅처럼 떠받는 순간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스크린 밖 현실을 빗대어 보게 만든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면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아마 두 가지 정도였을 거다. 하나는 누가 봐도 코믹스, 판타지 세계관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영화의 형식을 가져가는 것이다. 그랬을 때 관객은 자연스럽게 직접적인 이야기에 거리를 두게 되고, 그 이야기가 은유하는 바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수준에서 영화를 즐겨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런 이야기가 극장을 나오는 동시에 그저 영화 속 이야기로 한 번쯤 얘기될 정도의 현실일 때다. 


하지만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랬듯이 현실적 배경을 묘사하고 있어 관객들로 하여금 이 이야기가 코믹스 세계 속에서만 벌어진(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현실감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현실은 이런 묻지마 범죄로 포장된 약자를 향한 혐오 범죄가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각 나라마다 체감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조커’를 보고 극장을 나오며 그저 ‘아서가 참 안됐네’ 혹은 ‘조커라는 캐릭터가 저렇게 탄생되었구나’하고 딱 거기까지만 오락적으로 즐길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부러 이런 잘못된 선동을 하려고 영화를 만든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풀어냈을 때 (그것도 완성도 높게 풀어냈을 때) 현재의 관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몰랐다면 무지한 거고, 알고 있었지만 의도는 그게 아니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무책임한 거다.

‘조커’는 분명 인상적인 영화다. 이미 여러 코믹스와 영화를 통해 배트맨만큼이나 팬덤을 가지고 있는 조커라는 캐릭터를 와킨 피닉스라는 완성된 배우가 연기했을 때 갖는 영향력은 영화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일 수 있다. 그래서 영화 ‘조커’는 인상적이지만 결코 동의할 수는 없는 영화다. 아서의 죽음과 조커의 탄생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였다면 좋았을 텐데. 굳이 조커에게까지 공감대를 부여하려 한 시도는 분명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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