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 (Moonlit Winter, 2019)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있다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20년이나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 봐.
..
오랫동안 네 꿈을 꾸지 않았는데, 이상하지.
어제 네 꿈을 꿨어.
나는 가끔 네 꿈을 꾸게 되는 날이면 너에게 편지를 쓰곤 했어.
..
망설이다 보니 시간이 흘렀네.
나는 비겁했어.
너한테서 도망쳤고, 여전히 도망치고 있는 거야.
머지않아 나는 아마 또 처음인 것처럼 이 편지를 다시 쓰게 되겠지?
..
바보 같은 걸까? 나는 아직도 미숙한 사람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래도 좋아.
나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내가 부끄럽지 않아.
부치지 못한 편지 한 통이 있다. 단 한 번도 전달된 적 없지만 여러 번 수도 없이 다시 반복해 쓰인 편지. 그렇게 매번 차마 보내지 못했던 쥰(나카무로 유코)의 편지는 우연한 기회에 결국 윤희(김희애)에게, 아니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에게 전해진다.
임대형 감독의 영화 ‘윤희에게 (Moonlit Winter, 2019)’는 오랜 시간 참아왔던 감정을 한 발 뒤에서 말없이 마주하는 이야기다. 서로에 대한 감정을 숨겨야만 했던 혹은 세상의 질타로부터 도망쳐야만 했던 시간들을 직접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현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도록 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때를 그려내지만 그 순간에도 영화는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두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단 한 번 만나는, 아니면 간절하게 바란 끝에 결국 만나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과는 달리 ‘윤희에게’의 윤희와 쥰은 결국 만나게 되지만 극적으로 묘사되는 외부의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2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그들을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그런데 윤희와 쥰의 감정을 결코 담담하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담담한 것은 영화가 이 둘의 감정을 그리는 방식이지만 동시에 그 감정의 솔직함과 뜨거운 온도는 덜하지 않았다는 걸 분명히 한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동안 각자의 삶이 어떠했는가 그리고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내 왔는가를 통해 그 감정을 그려낸다.
‘윤희에게’는 얼핏 많은 부분을 이미지에 기대고 있는 혹은 무드로 이야기를 대신하는 영화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구조적인 영화에 가깝다. 윤희와 그의 딸 새봄. 그리고 쥰과 그의 고모의 관계는 서로에게는 물론 이 둘 간에 묘한 대구를 이룬다.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서로에게 전하는 이야기이자 본인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인 동시에 오래전 원치 않게 이별해야만 했던 윤희와 쥰에게 전하는 바람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영화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이 둘의 삶을 교차해가며 말하지 않은 것들을 세련되게 풀어낸다.
‘윤희에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까지 꾹꾹 숨겨가며 살아냈던 이들이 다시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일종의 마침표다. 최종적인 마침표가 아닌 언젠가 한 번은 짚고 넘어갔어야 할 인생의 마침표. 이제 윤희도 쥰도, 또 새봄도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쓸쓸하지만 위로가 되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