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2017)
우린 무얼 낭비하며 살아가나
여름과 첫사랑은 닮았다. 한 여름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과 어찌할 바를 몰라 두근거리는 마음의 온도가 닮았고,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뜨거움이 닮았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다음 계절을 맞는 여름처럼, 첫사랑 역시 이미 시작할 때부터 끝이 예정된 운명이라는 점도 닮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름을 다룬 영화들은 본능적으로 시작과 끝을 담는다. 그것이 첫사랑에 관한 것일 때 더욱. ‘아이 엠 러브 (I Am Love, 2009)’와 ‘비거 스플래쉬 (A Bigger Splash, 2015)’를 연출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2017)’은 그 해 여름 가장 뜨거웠던 열일곱 소년 엘리오 (티모시 살라메)와 스물넷 청년 올리버 (아미 해머)의 사랑을 그린다.
뜨겁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찬 한 여름 이탈리아의 크레마라는 마을은 자연이 주는 것들 만으로도 이미 충만해서 더 이상 무언가를 채울 수 없을 것만 같다. 더위로 가득 찬 공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이 주는 최대치의 평화로움이랄까, 더 이상 무언가를 채울 수도 채울 필요도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엘리오에게서 싹을 튼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틈을 비집고 조금씩 세어 나온다. 일종의 불가항력처럼 내적으로 꾹꾹 누르려해도 가둬둘 수 없는 올리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엘리오의 눈빛과 말, 몸짓을 통해 점점 더 짙게 세어 나온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그 과정을 아주 천천히 세심하게 바라본다. 단 번에 터져 나와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감정도 극적이지만, 이 영화처럼 아주 조금씩 마치 상대가 이런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작은 신호를 보내는 과정(한 편으론 혹시 알아채면 어떡하지 하는 조심스러움도 함께)의 섬세함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얼마나 엘리오와 올리버를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지 역으로 말해준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건, 시종일관 엘리오의 입장에서 올리버를 향한 감정의 신호들이 짙어질 때쯤, 정확히 말해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순간 영화는 잠시 올리버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는 주로 엘리오의 감정선을 따라 클로즈업과 시선을 담아내던 카메라는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감정을 고백한 그 순간, 올리버의 얼굴을 엘리오의 시선이 아닌 올리버의 입장으로 담아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올리버는 이런 말을 엘리오에게 건넨다. ‘난 충분히 신호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부터 이전까지는, 비록 숨기려고는 했지만 겉으로 세어 나오던 엘리오의 감정에 비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던 올리버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니 이제야 알아챌 수 있게 된다. 보통의 이야기였다면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 순간 행복의 겨운 엘리오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텐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바로 이 순간부터 마치 그동안 꾹꾹 눌러 왔던 감정의 동굴에서 해방된 듯 행복한 올리버의 모습을 담아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동안 엘리오의 감정을 쫓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올리버의 감정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더 진한 여운을 남기는 건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올리버를 단순히 엘리오가 겪은 첫사랑의 대상으로만 머물게 두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로 남게 되는 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점. 왜냐하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한 여름 같이 뜨거운 감정 그 자체의 사랑에도 주목하지만, 계절이 지난 뒤 남게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어쩌면) 더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엘리오와 올리버의 감정만큼이나 아름답고 심지어 놀랍게 까지 느껴졌던 이들은 다름 아닌 엘리오의 부모였다. 엘리오는 몰랐지만 이미 그의 감정이 조금씩 세어 나올 때부터 아들의 올리버에 대한 감정을 눈치챘음에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거리를 두고 지켜봐 주는 부모의 모습은, 엘리오를 바라보는 그 표정이 잊히지가 않는다. 동성에게 느낀 사랑과 그로 인해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던 아름다운 정답을 몸소 보여준다. ‘동성에 대한 사랑은 어린 시절 일시적인 거야’,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야’, ‘괜찮아’ 라는 잘못된 위로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어’,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야’ 라는 어설픈 위로도 아닌, ‘과연 저런 부모가 존재할까, 아니 내 아이가 엘리오와 같은 사랑을 겪게 된다면 과연 저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감정과 위로에 대한 교과서가 있다면 반드시 기록해야 할 말과 표현을 전한다. 그래서인지 엘리오와 아버지의 이 시퀀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눈물이 울컥했다. 내게는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나는 과연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일까? 하는 질문과 함께 영화 속 엘리오처럼 진정한 위로를 받은 것만 같아서.
엘리오의 아버지가 전하는 말 가운데 가장 소중하게 느껴졌던 건 ‘낭비하는 것’들에 관한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부분 그 상대와의 관계가 끝이 나면 함께 소멸되곤 한다. 감정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이 함께 소멸되고, 또 지워져 버리고 만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 사랑했다는 순간과 시간들은 그 감정 하나 만으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와 미처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무언가를 함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사랑이 떠났거나 끝났다는 이유 만으로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지우고, 또 모두가 잊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런 과정들에 대해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 라며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다른 여러 가지 외적 요소들로 인해 내 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시간들과 마음의 상처는 물론, 그렇게 한 동안 내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던 감정과 그 감정이 만들어낸 수많은 것들을 사랑이 끝남과 동시에 지워버리는 건 삶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라고.
우린 무얼 얼마나 낭비하며 살아왔던 걸까.
1. 나만 좋아하고 싶었던 Sufjan Stevens가 참여한 사운드트랙은 정말 듣기를 멈출 수가 없네요.
2. 마이클 스털버그.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부터 좋아하기 시작한 배우인데 최근 필모그래피가 엄청나네요. 셰이프 오브 워터’에 이어 이 작품까지. 빨리 블루레이가 나와서 마지막 대화 시퀀스 계속 반복 시청하고 싶어요. 이 대사들은 외워도 좋을 듯.
3. 티모시 살라메. 이 작품과 ‘레이디 버드’까지. 1995년 생의 어린 이 배우는 과연 앞으로 어떤 영화들을 선사할지. 어마어마하네요.
4. 원작 소설에도 등장하는 몇 년 후의 엘리오와 올리버의 이야기를 다룬 속편도 제작될 예정이라는데 (배우들도 그대로 출연하고),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