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쇄를 찍자 (重版出来)
모두에겐 초심이 있었다
‘중쇄를 찍자’라는 일드가 있다는, 그것도 아주 재미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건 제법 오래되었는데 마땅한 기회가 없어서 잊혀 가던 중, 우연히 찾아본 올레 TV에 무료로(무료로!) 올라와 있어서 최근에서야 감상하게 되었다. 만화 주간지의 편집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업계의 이야기인데, 만화, 출판계에 관심이 많다면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주인공의 성장 드라마로 자연스럽게 읽히는 웰메이드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던 때는 나 역시 출판과 편집 등에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되던 시점이었는데, 만화를 연재하는 만화가들과 출판을 위해 담당자로서 존재하는 편집자 (편집자를 단순히 조력자로 표현하기엔 부족한 측면이 많다)의 관계와 각자의 역할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 볼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사실 편집자라는 역할이 업계 관계자가 아니라면 일반 대중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전까지는 단순히 플레이어를 돋보이게 (혹은 정돈해서) 만드는 조력자 정도로 알고 있었다면, ‘중쇄를 찍자’를 통해 엿본 편집자의 존재는 분명 태생적인 한계는 존재하지만 또 다른 플레이어로서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원석을 가공해 보석으로 만드는 장인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해준다.
한 편의 만화가 세상에 나와 독자들에게 읽히기까지의 과정을 엿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내가 더 흥미를 갖게 된 건 회사/사회에서 한 명의 직원/인간이 어떻게 성숙 혹은 무뎌져 가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 부분이었다. ‘중쇄를 찍자’는 쿠로키 하루가 연기한 쿠로사와 코코로의 성장 드라마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나머지 편집부원들의 이야기가 주변인의 에피소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메시지를 어쩌면 더 잘 표현해 내는 각각의 이야기로 존재한다. 10부작의 짧은 분량에도 거의 한 편마다 한 명의 주인공을 골라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인데, 놀랍게도 그들 각자의 이야기마다 아주 현실적인 사회생활에 대한 고민과 지혜 혹은 푸념이 담겨 있다.
모두가 인상적이었지만 그중 한 가지만 꼽으라면 6화에 등장했던 야스이의 이야기를 들고 싶다. 악역으로 생각하기 쉬운 인물이 왜 그렇게 되었는 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형적인 방식이지만, 야스이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현실적인 공감대는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멀게 느껴졌던 야스이를 완전한 내 이야기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회사를 관두고 브런치를 통해 관련한 썰을 제법 길게 풀어내기도 했던 나였기에 지금의 야스이를 만든 과거의 이야기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나도 비슷한 경험과 과정을 거치며 결국엔 야스이처럼 모든 것에서 넘쳐나는 열정을 스스로 식히고 적당히 할 것을 되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으로도 모자라 결국 퇴사하는 것을 택했지만).
야스이의 이야기 말고도 각각의 인물들에 빗대어 들려주는 이야기는 적어도 허황되거나 부질없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코믹스에서 튀어나온 듯한 주인공 코코로의 오버스런 캐릭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인 그리고 아주 정확한 시선으로 사회생활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통달한 듯한 작가가 그럼에도 완전 초짜인 쿠로사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 모두에겐 초심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가끔은 그런 초심이 그립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엄두가 나질 않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가져볼까 고민하게 되는 것처럼 나 역시 누구 못지않은 초심이 있었다는 것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쿠로키 하루가 나랑 생일이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