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 (EXIT, 2019)
과장하지 않고도 진심을 끌어내다
영화를 보는 데에 있어 가장 큰 적(?)이라면 아무래도 기대감일 것이다. 높은 기대감은 그만큼 충족시켜야 할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실망으로 이어지기 쉽고, 반대로 기대감이 낮다면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들이 있다. 조정석과 윤아가 주연을 맡은 재난 액션 영화 ‘엑시트 (EXIT, 2019)’는 솔직히 기대감이 낮았던 영화였다. 그건 (영화를 보기 전이니) 당연히 ‘엑시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존에 개봉했던 여러 한국영화들, 특히 재난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엑시트’는 비슷한 장르의 이전 영화들이 답습했던 패착들을 거의 모두 다 피해 간(혹은 참아낸) 영화였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하고 재미가 있다. ‘이런 단점들만 피해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말이야!’
영화는 재난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과 재난이 벌어지고 난 상황, 이렇게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영화들이 가장 낮은 수준을 드러내는 부분이 바로 재난 이전의 평화로운 상황 묘사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캐릭터 설명 및 반드시 웃겨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유치한 결과물을 보여줄 때가 많다. 도대체 누가 저런 유머를 재미있어하는지 모를 유머를 담당하는 캐릭터가 반드시 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재난 이전 상황의 묘사에 있어서 너무 허투루 시간을 소비하는 경향이 많은데, ‘엑시트’는 이전 상황의 이야기도 간결하고 또 재미있었다.
이 길지 않은 분량을 통해 아주 짧게 한국사회만의 디테일을 묘사하는데, 정말 이런 식으로 끝까지 끌고 갈 재주만 있다면 이렇게 두 시간을 보내는 영화도 충분히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짧은 대사와 상황들을 통해 아마도 한국 관객들이라면 너무 현실적이어서 여러 차례 목격했을 만한 상황을 과하지 않게 그려내고, 또 그 안에서도 관객들이 캐릭터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집약적으로 설명해 낸다. 이 재난 이전 시퀀스의 간결함과 집약된 전개가 이후의 이야기를 훨씬 쉽게 집중하도록 만든다.
재난이 닥치고 난 뒤의 상황들도 앞서 말한 한국영화, 아니 수준 낮은 재난 영화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쓸데없이 무게감까지 만들어 내기 위해 거대한 음모에 집중한다던가 하는 이질감도 없고, 중간에 반드시 웃겨야 한다는 강박 관념의 산물도 없다 (이게 가장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난을 대하는 감독의 시선이 인상적이었는데,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 외에 인물들의 생명에 대해 재난 영화가 가볍게 생각하는 것에 반해 최대한 필요 없는 직접적인 묘사는 피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특히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위해 일부러 자극하는 억지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혼자 의외였던 건 그냥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의외의 장면과 예상되었던 장면에서 모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만의 힘인지, 아니면 한국 관객 대부분이 겪고 있는 지난날의 참사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물들의 간절한 마음이 표정으로 대사로 드러날 때마다 눈물을 참기가 정말 어려웠다. 아, 분명히 이 영화가 갖은 힘 때문인 점도 있다. 조정석, 윤아 두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가 자신의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 타인의 생명을 두고 갈등하는 장면은, 다른 거대한 재난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진짜 리얼한 모습이었다. 보통의 재난영화라면 더 영웅적 면모를 부각했겠지만 ‘엑시트’에서는 더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했음에도, 더 큰 감동과 더 큰 공감을 만들어 냈다.
재난이라는 비극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유쾌함을 잃지 않지만 무엇보다 그 누구 하나 불편하게 만들거나 상처 받게 하지 않는 간결함과 진심이 돋보이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