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김영하 산문)
아무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
솔직히 고백하면 요 몇 년 사이 나는 소설을 읽어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는데 끝내 잘 읽히질 않아서 초반에 읽기를 포기한 일이 많았다. 어려운 소설을 처음부터 고른 것도 아니었고 잘 안 읽힌다는 걸 알았기에 비교적 관심이 높은 소설을 일부러 골라서 읽었음에도 잘 읽히지가 않았다. 영화 서사에는 남들에 비해 곱절로 쉽게 공감하고 빠져드는 내가 소설에는 어인 일인지 잘 빠지질 못하더라.
그래서이기도 하지만 김영하 작가의 글은 유명한 소설책들이 아니라 이번에 나온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을 통해 글 쓰는 사람이 여행하는 것이 어떤 매력이 있는지를 알게 해 준 그가 쓴 여행 관련 산문집이었기에 선택하는 데에 고민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의 또 하나의 선입견. 왜 나는 이 책을 당연히 여행을 떠나서, 여행지에서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쉽게 착각했던 것일까. 챕터도 나라 혹은 도시 별로 되어 있고 그동안 작가가 여행한 여러 곳들을 에피소드를 통해 소개하는 보통의 여행기라고 생각했었는데, 다 읽고 나니 이 책은 제목에 명시했듯이 ‘여행의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었다.
김영하 작가 스스로가 말했던 것처럼 그가 말하는 여행의 이유란 아주 짧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답게 그 짧은 이유에 대해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설득되도록 풀어낸다. 책의 페이지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기도 하지만 (약 200페이지), 최근 들어 이렇게 끝까지 술술 한 숨에 읽어간 책이 있었나 싶다. 특히 나는 일의 특성상 가게에서 손님이 없는 틈틈이 읽고 그쳤다가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쉽게 잘 읽히는 책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부러운 능력은 독자들로 하여금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히는 글을 쓰는 것인데, 내가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고른 ‘이유’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내는가. 역시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쓰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는 그냥 좋은 글을 한 편이라도 더 읽어 보는 것이 낫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나도 요즘 이런저런 현실적 이유 때문에 여행이 몹시 간절한 상태인데, 예전처럼 훌쩍 떠나버리는 여행은 한 동안 어렵겠지만 여행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다른 종류의 작은 여행들을 시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진짜 방구석에서 눈을 감고 하는 여행부터, 그곳이 어디든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아무도 아닌 자(nobody)가 되어 보는 형태의 여행을 계획해 본다.
* 이 책을 읽고 나서 갑자기 다시 읽고 싶어 진 책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이다. 김영하 작가가 이 책의 여러 번 참고하기도 했고, 최근 재미있게 했던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의 잔상이 아직 짙기도 하고.
* 호텔에 대한 작가의 의견에 적극 공감했다. 나도 그런 이유로 호텔을 좋아한다. 그래서 호캉스라는 것도 생긴 것 같고. 순간이나마 현실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순간을 만끽할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