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感想)

빌리 진 킹 : 세기의 대결 _ 지금 다시 말할 필요가 있는 영화

빌리 진 킹 : 세기의 대결 (Battle of the Sexes, 2017)
지금 다시 말할 필요가 있는 영화

엠마 스톤과 스티브 카렐이 함께 웃으며 기자 회견을 하고 있는 장면이 담긴 포스터만 보면 마치 두 사람이 유쾌한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인데, 영화 ‘빌리 진 킹 : 세기의 대결 (Battle of the Sexes, 2017)’은 유쾌한 방식으로 그려내기는 했지만 그 대결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은 테니스 스타 두 사람의 대결을 그린다.

여성의 권익 상승과 양성평등의 바람이 불던 70년대 초 미국을 배경으로 벌어졌던 실제 사건인 여성 테니스 선수 랭킹 1위 빌리 진 킹과 전 윔블던 우승자 출신의 55세 테니스 스타 바비 릭스의 테니스 경기를 담고 있는 영화는, 제목에서는 스포츠 영화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나지만 (‘성(性) 대결’에서 ‘성’을 빼는 바람에 더욱) 스포츠 영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지난해 개봉했던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6)’처럼 시대의 가치관이 배경에 그치지 않고 중요한 메시지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일반적인 페미니즘을 다룬 영화들보다 좀 더 입체적인 건 스티브 카렐이 연기한 바비 릭스라는 캐릭터 때문이다. ‘성대결’이라는 제목과 영화의 초반 분위기로 보았을 때 남자 선수에 비해 턱 없이 적은 우승 상금을 문제 삼아 스스로 다른 여자 선수들과 함께 협회를 만들고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해 나서게 되는 빌리 진 킹의 상대편에는 남성우월주의로 가득 차 있는 마치 악당과도 같은 남성 캐릭터가 존재할 듯싶은데, 바비 릭스라는 캐릭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바비 릭스라는 캐릭터는 윔블던에서 우승했을 정도로 왕년의 스타였지만 지금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도박에 빠져 살고 있는 이로 그려지는데, 그런 그가 떠올린 아이디어가 바로 빌리 진 킹과의 테니스 성대결이다. 즉, 영화는 여러 가지 장면들과 장치들을 통해 바비 릭스가 그저 남성우월주의라는 자극적인 도구를 활용해 쇼를 펼치는 광대일 뿐이라는 걸 알리고자 한다. 

심지어 대결의 상대였던 빌리 진 킹 조차도 바비가 그저 이 쇼를 기획한 광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데, 바꿔 말하자면 킹 역시 바비 릭스와의 대결을 이용해 자신이 평소 주장하던 양성평등의 세상을 앞당기고자 한다. 이 같이 명확한 1:1의 대결 구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울뿐인 상대와 대결하게 되는 구도는 좀 더 흥미로운 지점을 만드는데, 첫 번째는 바비 릭스라는 캐릭터에 대한 입체적인 평가가 가능하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바비의 뒤에 서 있는 진짜 권력인 당시 남성 중심의 미국 사회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빌 풀먼이 연기한 잭 크레이머로 대표되는 당시 미국 사회의 남성 중심적 가치관과 여성을 바라보는 수준 낮은 시선은, 반대편에 서 있는 여성과의 1:1 대결의 주체로서 등장했을 때보다 오히려 이렇게 허울뿐인 존재 뒤에 서 있을 때 (서 있을 정도 밖에는 안된다는 걸 스스로 증명했을 때) 더 생각해 볼만한 거리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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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영화가 좀 더 특별한, 아니 씁쓸한 이유는 영화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 때문이다. 영화의 말미, 킹과 여자 선수들의 의상을 만들어 준 게이 디자이너는 킹에게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생긴 대로 살아도 되는 세상이 올 거야’. 킹과 그 디자이너는 70년 당시 그런 현재를 기대했겠지만, 지금이 과연 그들이 꿈꾸는 세상과 근접했는가를 되묻는 다면 결코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주 직접적으로 엠마 스톤은 여성 배우로서 근래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게 되었지만 아직도 남자 배우의 출연료와는 단순한 관객 동원력의 차이를 넘어서는 차별이 존재하며, 멀리 미국의 예를 말하기 이전에 국내에서도 양성평등을 말하기엔 아직도 사회적으로 턱 없이 모자란 현실이다. 

그래서 오히려 시종일관 유쾌함을 잊지 않으려는 이 영화의 리듬과 메시지는, 심각한 시선으로 불평등을 말했던 영화들 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1. 스티브 카렐과 엠마 스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영화. 나만 그런 것 같지만 엠마 스톤이 오히려 ‘라라 랜드’ 때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이더라.

2. 스티브 카렐과 실제 바비 릭스의 싱크로율은 놀라울 정도!

3. 스크린을 통해 정말 오랜만에 본 엘리자베스 슈가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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