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感想)

히든 피겨스 _ 최초가 되어야만 했던 이들의 역사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6)
최초가 되어야만 했던 이들의 역사

 

가끔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볼 때 이렇게 푸념하곤 한다. ‘아, 이건 너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네. 현실감이 없잖아’라고. 주인공이 말도 안 되는 역경을 딛고 기어코 성공을 거두거나, 백만 분의 일 정도로 벌어질 만한 일이 주인공에게 벌어져 결국 해피 엔딩을 맞게 되는 걸 보면 영화의 짜임새와는 별개로 조금은 허탈해지는 감이 없지 않은데, 비슷한 스토리텔링을 담고 있음에도 이러한 영화 속 이야기에 토를 달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그건 바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다. 실제로 몇몇 영화들은 보고 나서 ‘이건 아무리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해도 너무하잖아’라고 생각했으나 실제 주인공의 이야기를 찾아보고는 오히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에 놀랐던 적도 있었을 정도니.

1960년대 미국 NASA에서 근무했던 세 명의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메리 잭슨의 이야기를 그린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6)’도 이 같은 경우다. 실제 3명의 인물들이 당시의 차별적이고 비인권적인 시대의 한가운데서 거둔 삶의 종적들은 그야말로 영화라고 해도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테오도어 멜피 감독의 영화 ‘히든 피겨스’는 뻔한 자서전적 성공담으로도, 그렇다고 역경을 이겨내는 또 다른 휴먼 드라마의 전형적인 구조로도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최대한 이러한 익숙한 것들에서 거리를 두고자 면밀히 애쓰는 동시에 메시지의 자연스러운 전달에 더 큰 공을 들이고 있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부당한 차별과 이에 맞서 투쟁해야만 하는 이들의 연대와 용기에 대한 메시지 말이다.

# 인간이 달에 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던 차별의 역사

가끔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어떤 사안을 두고 아마 10년 혹은 몇십 년 뒤에는 현재 아무렇지 않은 어떤 일들처럼, 예전에는 그랬었데 하며 황당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게 될 거라고. 다시 말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 가운데는 인류가 조금만 더 성숙해지게 된다면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을 불평등, 차별, 비인권적인 일들이 존재한다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미국 사회는 백인 남성 중심의 사회로 유색인종은 백인들과 화장실을 같이 쓸 수도,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을 수도, 같은 커피 포트를 사용할 수도, 건물의 같은 입구를 사용할 수도 없었던 차별이 존재했던 사회였다. ‘히든 피겨스’는 이러한 시대의 한가운데에 있던 3명의 흑인 여성의 관한 이야기다.

아마 이 영화가 실화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서두에 말했던 것처럼 ‘이건 너무 영화 같다’라고 분명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과 영화가 선택한 주인공 그리고 그 주인공들이 이뤄낸 성과가 너무 영화적으로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누군가가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차별을 이겨낸 인물의 이야기를 쓰고자 했다면 인간을 우주로 보내는 계획이 한창이던 NASA를 배경으로 시대와 정반대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메타포로 활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인간을 달에 보낼 수 있을까 없을까 라는 시대적 난제를 겉으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그만큼이나 불가능했던 차별의 벽과 맞서 싸워야 했던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히든 피겨스’의 이야기는 실화였기 때문에 이 같은 픽션이 갖게 되는 또 다른 전형성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실제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굳이 극적으로 강조하고 포장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위대하기 때문이다. 많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믿기 어려운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어떻하면 더 인간 승리의 극적 드라마로 그려낼까 고민하다가 오히려 실화가 담고 있던 본래의 힘마저 평범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히든 피겨스’는 실제 인물들이 갖고 있던 삶의 메시지를 믿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둠으로써, 메시지를 손실 없이 살려냈고 전달해 냈다.

# 어설픈 이해의 잘못을 경계하다

(이것도 실화인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흔히 차별을 당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릴 땐 그 주변에 주인공을 이해하는 주류(혹은 가해자) 그룹의 조력자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 차별당하는 흑인을 이해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문제 삼는 백인이라거나, 차별당하는 여성을 이해하는 주류 사회의 남성이라든가 말이다. 그런데 이런 캐릭터들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실화여서 실제 그러한 인물이 존재했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라던가 ‘그 가운데도 양심 있는 자가 있었다’라는 식의 면죄부를 주기 위한 장치로서 존재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더 나아가 차별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있다고 묘사되는 인물 역시 냉정히 따져보자면 은연중에 차별적 시선을 근간에 두고 있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주로 이런 경우는 제삼자가 조금은 조심스럽지 못한 태도로 섣불리 접근했을 때 범하는 실수인데, ‘히든 피겨스’가 좋았던 건 이러한 어설픈 시도나 이해를 스스로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이러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는 캐릭터는 크게 두 명 정도를 꼽을 수 있겠는데, 그 첫 번째는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한 해리슨이다. 캐서린 존슨 (타라지 P. 헨슨)이 속한 부서의 책임자이자 해당 우주 프로그램의 책임자인 그는 캐서린의 수학적 능력을 인정하고 그녀가 겪는 인종 차별적 문제들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책을 책임자로서 보여주기도 하는데, 얼핏 보면 인종차별적인 행태들에 대해 문제적으로 느끼는 반차별적인 인물이자 조력자로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와는 조금 다른 경우다. 극 중 해리슨이 보여주는 행동은 냉정히 말해서 인종으로 인해 차별당하는 것에 대해 부당함을 지적한다기보다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제거하고 일이 빨리 진행될 수 있도록 만드는, 좀 더 합리와 비합리의 측면에 가깝다. 극 중 대사로도 나오지만 숫자밖에 모르는 해리슨이 캐서린을 돕게 되는 건 그녀가 부당한 차별을 당하고 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가 그 차별로 인해 자신이 시킨 일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사건들이 몇 번 반복되면서 아주 살짝 해리슨이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은 뉘앙스도 전달하지만, 영화는 딱 거기서 멈춘다.

두 번째는 커스틴 던스트가 연기한 비비안 마이클이라는 캐릭터다. 도로시 (옥타비아 스펜서)의 관리직으로 등장하는 그녀는 영화 속에서 도로시를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승진에서 제외하는 백인 상사로 묘사되는데, 이것도 뒤집어 보면 사실은 정반대로 비비안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른 백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최대한 도로시의 입장을 (표현은 안 해도) 봐주려고 하는 인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도로시와 대화를 나누던 중 ‘악감정은 없으니 오해 말아요’라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여기서 돌아오는 도로시의 대답은 이 영화의 포인트 중 하나다. ‘당신은 그런 줄 알겠죠’라는 말.

이걸 비비안의 입장에서 풀어서 말해보자면 나는 그래도 다른 백인들에 비해서 유색인종들을 차별하지 않는 편이고, 최대한 편의를 봐주려고 하고 그런 이유로 부당한 처우를 준 적도 없어요 라는 건데, 실제로 많은 차별의 경우 가해자의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이 이런 식의 ‘나는 달라’ ‘나는 아니야’라는 착각에 빠진다는 걸 미뤄보자면 이 장면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자신은 차별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비교적 진보된 시각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즉 자신 역시 누군가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별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차별적 시선에서 벗어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차별, 더 나아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주된 대상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유색인종과 여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히든 피겨스’에는 넓게 보았을 때 극도로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해 혐오와 차별의 시선을 갖고 있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공간에 유색인종과 함께 있다는 걸 신기하고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정도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신기하고 이상하게 바라본 다는 것 자체가 바로 혐오와 차별이 아니냐 라고 되물을 수 있을 텐데, 물론 그렇다. 바로 그것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차별과 혐오를 이야기하고자 꺼낸 방식 중에는 흑인 노예제나 여성 참정권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직접적이고 극렬하게 대립되는 방식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좀 더 일반적인 선택일 듯싶은데, ‘히든 피겨스’가 선택한 방식은 그 충격이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오히려 아주 자연스럽게 차별적 인식에 대한 무지를 깨닫게 되는 조금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1960년대 미국 사회를 보면 마치 백인과 흑인이 비교적 서로의 영역을 지키며 평화롭게 공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종 갈등으로 매번 대립하지 않고 규칙을 정해 서로가 부딪히는 일을 최대한 만들지 않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이며, 그 정해진 규칙 속에서 어느 정도의 평화가 유지되는 듯하다. 하지만 이건 명백히 가해자인 백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의 평화이자 배려이고 규칙이다. 매번 화장실을 갈 때마다 같은 건물에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이 없어서 멀리 800미터나 넘게 떨어진 다른 동의 전용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숨차게 달려야 하는 캐서린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규칙은 서로 공존하기 위한 평화적 합의가 아니라 여전히 상대를 혐오하는 지배적인 규칙에 가깝다.

‘히든 피겨스’가 차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방식은 좀 더 현실적인 문제의식이다. 즉,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해 혐오의 시선을 갖고 있는 이들을 계몽시키기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무지 속에 그런 시선과 행동을 취하고 있는 더 많은 수의 차별 가해자들의 뒤로 다가가 작지만 강한 목소리로 ‘너흰 사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차별을 구별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분명한 차별이라는 점을 인지시키고, 더 나아가 수 많은 이들이 그 차별이 팽배한 시대에서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부당함을 당해 왔어야 했는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되묻는다.

아,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한 가장 큰 오독은 이러한 차별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둬 스스로 증명해 인간 승리를 거둬야 한다는 해석일 거다. 실제로 많은 영웅적 면모를 다룬 영화들이 그 인물의 이야기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 인물이 처한 상황과 당해야만 했던 부당한 일들을 단지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만 묘사하는, 그래서 오히려 추가적인 폭력을 가하게 되는 일이 많은데, ‘히든 피겨스’는 서두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간이 달에 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들을 해낸 인물들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는 있지만 결코 그들의 천재적인 능력이나 기적적인 이야기로 그려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런 부분에 있어 가장 조심하려 애쓴다. 만약 백인 남성이었다면 우주 비행사를 꿈꿨을 거냐 라는 질문에 그럼 벌써 됐을 테니까 꿈꿀 필요도 없었겠죠 라고 질문자를 당황하게 만든 메리 잭슨의 대답처럼, 이 영화는 역경을 극복한 인물의 이야기에서 메시지를 찾는 영화가 아니라 반대로 그들이 처했던 비정상적인 사회의 면면을 은연중에 드러내 무지를 깨우치고 개선하기 위한 것에 더 메시지가 있다.

차별의 가해자 입장인 백인 캐릭터들 외에 흥미로운 캐릭터라면 마허살랴 알리가 연기한 짐 존슨을 들 수 있겠다. 극 중 캐서린에게 관심을 보이고 접근하는 짐 존슨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을 차별 혹은 비하하는 말을 건네게 되는데, 이 순간과 이후 그가 보여준 행동은 분량으로는 적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와 정확히 겹쳐지는 장면이다. 즉, 같은 흑인들 사이에서도 남녀 사이에는 차별적 인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차별을 당하고 있는 피해 당사자가 또 다른 자신보다 더 약하거나 소수에 대해 혹시 차별적 시선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게 만든다 (여기서 더 길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사실 이 문제는 가장 첫 번째 가해지는 차별과 혐오의 문제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다). 더 중요한 건 그다음 존슨의 행동이다. 존슨은 바로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본인의 말과 행동에 의도가 없었더라도 상처나 비하의 결과가 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뉘우치며, 진심으로 사과의 입장을 취한다. 어떠면 이 영화가 가장 바라는 현실적 인물의 상은 짐 존슨일지도 모르겠다. 설령 자신의 말과 행동에 잘못이 있었더라도 그 잘못을 인지하게 된 순간 바로 인정하고 고쳐나가려는 의지를 가져야 하지 않겠나 하는 최소한의 바람. 그래서 캐서린과 짐의 이야기도 결코 작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 누구의 도약이든 그건 모두의 도약이다

‘히든 피겨스’는 앞서서도 말했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역경을 이겨낸 흑인 여성 천재 수학자의 전기로 만들기에 너무나도 적합한 소재였다. 아마 그렇게 제작되었더라도 제법 많은 인기를 얻었을 테지만 (아, 씁쓸하지만 오히려 더 많은 대중적 인기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히든 피겨스’는 더 나은 영화로 관객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유독 강렬하게 다가왔던 대사가 있었는데 세 명의 주인공이 누군가의 승진과 이를 부러워하는 것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단호한 어조로 ‘누구의 도약이든 그건 모두의 도약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이처럼 강한 연대의 메시지라니. 듣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비정상적이고 차별적이었던 시대를 견뎌야 했던 이들의 절실함이 느껴지는 동시에, 그럼에도 그 돌파 여부와는 상관없이 끝까지 연대의 정신을 잊지 말자 라고 되네이는 그들의 모습에 존경의 마음이 느껴졌다.

보통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경우 사실 따지고 보면 한 명의 주인공이 있고 다른 두 명은 조력자 정도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히든 피겨스’는 그야말로 세 명 모두가 주인공인 영화다. 도로시 본과 메리 잭슨 모두 누군가의 조력자로 남길 거부하고 자신의 삶의 능동적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즉, 캐서린이 NASA에서 성공하기 위한 조력자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똑같은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걸 영화는 비교적 비중 있게 다룬다. 이건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아니,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뼈대가 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캐서린과 도로시, 메리를 각자 서로에게 조력자로 남게 하지 않고 조력자인 동시에 각자의 삶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관객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그려내는 것이 아마 이 영화의 가장 첫 번째 과제였을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연대의 정신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렵고 모호하기까지 한 지점인데, 이 영화는 그래도 어렴풋하게나마 저렇게 하면 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려냈다. 다시 말해 이론적으로는 이해하기 쉬워도 현실에선 결코 적용이 쉽지 않은 일들이 있는데, ‘누구의 도약이든 그건 모두의 도약이다’라는 슬로건을 ‘히든 피겨스’는 그저 허황된 이상적 구호로 흘려버리게 되지 않을 정도로,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 최초가 힘겹지 않은 세상을 위해

‘히든 피겨스’는 최초의 타이틀을 갖게 된 이들의 이야기지만 최초의 무엇이 되는 것이 목표이자 목적이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편으론 어쩔 수 없이 최초가 되어야만 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자주 최초라는 타이틀에 주목하고 환호한다. 최초의 무엇이 된 이들에겐 대부분 그렇지 못한 이들이 이겨내지 못한 역경이 있고, 또 응당 존경받아야 할 이유들이 존재하곤 한다. 물론 모든 경우에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불합리한, 비정상적인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최초가 되어야만 하는 세상은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사회 역시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끝내 이겨내고 최초의 소수가 되어 승리하라 라는 메시지가 아닌 그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모두가 노력해 결국 모두의 도약이 될 수 있도록 하자 라는 메시지를 전했으면 한다. 최초는 존경받아야 할 이유가 분명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최초가 힘겹지 않은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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